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53년 동독 봉기 (문단 편집) === 진행 === 6월 16일 동베를린의 건설 노동자들은 정부를 비판하며 파업을 결의한다. 파업의 소식은 삽시간에 동독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독 전역의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100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다. 동베를린에서만 4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급기야 시위대들은 일시적으로 동베를린을 넘어서서 서베를린에 도달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 내에서는 왕래가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의 일. 다음날인 17일이 되면 시위는 한층 격화되어 단순한 파업을 넘어선 소요로 발전한다. 전날만 하더라도 노동 부담 완화라는 요구 조건에서 보여지듯 노동 쟁의의 요소가 강했으나, 이 날이 되면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 지도부의 총사퇴를 시위대들이 요구했던 것. 위협을 느낀 동독 정부는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6월 초에 동독 내에서 반소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동독 주요 인사들을 불러서 일처리를 똑바로 하라고 조인트를 깠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미 소련군이 개입할 것은 분명했던 대목. [[T-34]] 탱크를 앞세운 2만명의 소련군이 8천여명의 동독 경찰과 함께 진압을 시작했고, 계획된 무장 봉기가 아니라 파업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민주화 시위였던 만큼 사태는 신속하게 진압된다. 동독 정권에서 밝힌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25명. 서구 측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사망자 수를 높게 잡는다. 사태 진압 이후 동독 정권에게 체포되어 사형 당한 희생자들까지 합치면 500명은 넘는다는 것이 냉전 기간 내내 서독 정부의 추측.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